아리랑 기행- 1957년 미국 유학 시대 > 이정면의 교양칼럼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이정면의 교양칼럼

아리랑 기행- 1957년 미국 유학 시대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052회 작성일 07-08-27 19:05

본문

제1편, 나의 길, 나의 아리랑

1. 나의 길

1957년 미국 유학 시대

다시 아리랑과의 만남은 이렇다. 1957년 미국 미시간 대학에 유학중이었을 때로, 어느 날 아시아 자료가 소장된 4층 도서관에서 우연히 쿡 목사가 쓴 한국 이류민들의 만주에서의 비참한 생활상을 기록한 책을 읽게 되었다. 흰옷을 입은 남녀노소가 이십 명, 때로는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이 언덕 저 언덕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넘어가는 애처로운 모습, 특히 아낙네가 왼손에는 냄비 같은 것을 들고 오른손에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등에는 또 하나의 아기를 업고 정처 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이 글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쿡 목사가 미국 본토로부터 종교재단의 경제적 원조를 노리고 묘사한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정든 고향을 떠나 두만강 나루터를 건너 낯설고 물선 만주벌판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유랑했다. 농민들은 일본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부지중에 생활이 쪼들리고 마침내는 토지를 잃게 되었고, 또 잔악무도한 일제의 탄압은 우리 농민들을 빈털터리로 만들고, 삶에 대한 희망마저 앗아가 실의와 절망 속에 몰아넣었다. 엄습해 오는 기근의 냉혹한 현실 앞에 부유 걸식하다가 마침내는 만주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당시 도쿄대학 총장이던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대학에서 식민정책을 강의하면서, 수만은 조선인들이 만주에서 유랑한 것은 동양 척식회사를 통한 일본의 토지정책의 실책이라며 조선 식민지 정책을 비판했겠는가?

새로운 삶을 찾아야 했던 비참한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나는 쿡 목사의 묘사가 한 치의 과장 없이 현실을 그대로 그린 것임을 알기에, 그 글을 읽으며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말레이시아 대학 초빙교수 시대

1967년에서 1970년대에 말레이시아대학 초빙 교수로 있었다. 그때 말레이시아 대사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었고, 의과대학에는 배수동, 이동식 교수가 있었으며, 뭄리과 대학에는 내가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전공이 지리학이므로 학생들을 데리고 야외 실습장에 자주 가야 했다. 하루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몇 시간 걸리는 먼 길을 떠났는데 지루한 차내에서 문득 아리랑이 생각났다. 그래서 반장이 가지고 있던 마이크를 들고 아리랑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별 설명 없이 가르쳤는데도 학생들이 아리랑을 곧잘 따라 불렀다.

그런데 다음해 내가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지리학과 전 학생들과 교수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모여 송별회를 해주었다. 열대의 달밤, 야외 옥상에서 벌어진 송별파티가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말레이시아는 오랜 세월 영국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그 시절만 해도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학생들이 틀에 짜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서구화된 지 오래 되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학생들의 활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놀란 것은, 파티가 막바지에 접어 들었을 때 사회자가 "우리는 이박사님의 미소를 잊지 않을 겁니다"하면서, 지난날 야외실습 때 가르쳐 준 아리랑을 합창하겠다는 것이었다. 말레이시아 수도 콸라룸푸르 시내의 전문 악단을 불러다 놓고 그들의 주악에 맞추어 학생들이 일어서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하고 우리말 그대로 부른 것이다. 감동적이었다. 그때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졌는지. 나를 울게 했던 그 아리랑, 잊을 수 없는 제자들과의 이별의 노래 아리랑이었다.


미국 중서부 산간지방 이민사 연구 시대

미국 중서부 산간지방의 한민족 이민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다. 우리 민족은 1920~1930년대를 전후하여 멀리 미국에서 유랑하며 말도 통하지 않고 낯선 풍속 속에서 우왕좌왕하였다. 바로 그들이 이 광산 저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헤매며 부르던 노래가 아리랑이었을리라는 생각을 했다. 현지 조사를 하며 그들이 묻힌 묘지를 찾아 그 앞에 섰을 때, 그들이 조국 산천과 두고 온 가족들이 그리워 부르던 아리랑이 귓전에 울려오는 것만 같았다.

1972년 유타대학교 교수로 부임했을 때, 유타를 비롯한 미국 중서부 산간지방 한민족 이민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게 되었다. 특히 묘지를 중심으로 사망자의 무덤을 찾아 중서부 산간지방 한민족 이민사를 정리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이 지방의 묘지는 거의 다 찾아보았다. 그리고 역사박물관과 여러 묘지 관리사무실도 찾아다녔다. 그러나 박물관에서 일본인과 중국인만이 이곳에서 일했으면 한국인은 일하지 않았다고 딱 잡아떼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이런 그들에서 중국인, 일본인과 함께 한국인도 같이 일을 했다고 설득하여 관련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을 때는 참으로 기뻤다.

이렇게 하며 마침내 유타에 있는 캐슬 게이트 묘지에서 한국인 '유공우'의 묘지를 찾아냈다. 비석에는 "1872년에 태어나 1924년 3월 8일 캐슬 게이트 광산 폭발사고로 사망했다"고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원적은 한국이고, 고향은 경기고 포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유공우씨를 이대로 광산노동자의 희생자로 묻혀 두기에는 너무나 아쉬워 KBS에 의뢰하여 그의 후손을 찾도록 했다. 그 결과 유공우씨가 백년 전에 살았던 경기도 포천군 자작리 185-6번지에 2, 3, 4대 후손들이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나를 비롯한 조사팀이 유공우씨 묘지를 발견한 지 1년 7개월 만에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찾아낸 것이다. 유공우씨는 고향 포천을 떠날 때 스물두 살, 아내와 네 살 된 아들을 남겨두고 미국으로 왔던 것이다. 포천의 후손들은 말로만 듣던 증조부, 미국 땅에서 홀연히 돌아 가셨다는 증조부, 떠나간 지 24년 만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가 남긴 아들로부터 80여 명의 후손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유공우씨는 단순히 백여 년 전 미국에서 객사한 노동자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나라를 빼앗기고 격량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국을 떠나 낯선 미국에서 살길을 찾으려 한 강인한 한국인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특히 1900년대 초 미국 중서부 산간지방에서 광산노동자로 일하던 한인들의 마지막 모습을 유공우씨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어쨌든 유공우씨는 탄광사고로 목숨을 잃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묘지가 남아 있어 그 발차취를 더듬을 수 있었다. 2000년 KBS '한미 100년 이민사'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유공우씨의 증손자 유재석씨와 함께 미국에 와서 나를 만나 묘지를 찾았다. 그때 유재석씨는 "이렇게 먼 곳에서, 이렇게 황량한 곳에서 증조부가 생활하셨구나. 먼 옛날 이 길을 증조부께서도 거치셨을 텐데..." 하며 울먹였다. 준비해 온 술과 고일을 놓고 유공우씨의 아내 남양 홍씨의 묘와 그 아들 유인찬씨 묘에서 파온 흙을 묘석 아래에 깔아주었다.

"이렇게 만나시면... 이렇게 흙이 되어 만나시면 어찌합니까? 증조부님, 증조부님, 이 모진 세월 당신만 기다리던 이분들을 위로해 주세요. 그토록 보고 싶어 하시던 아내와 아들의 체취가 배어 있는 흙입니다. 그토록 애태우며 그리던 고향의 흙입니다. 증조부님..., 죄송합니다. 백년 가까이 되어 제사를 올리는 후손을 용서해 주세요."

증손자 유재석씨와 제사를 올린 후 준비해 온 수건으로 비석을 닦는 순간 뜨거운 무엇이 솟구쳐 올라왔다. 농투산이로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아들. 그 삶 속 저편에 자리하고 있는 질긴 인연들. 문득 포천 자작리의 산과 들, 하늘이 떠올랐다. 마흔둘이라는 나이, 이제 세상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은 나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버텨온 힘든 세월..., 한참을 울먹이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고향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그분도 저 하늘을 바라보며 고향 산천이 그리우면 아리랑을 불렀으리라.

길을 읽고 헤매던 산속에서 별안간 큰길로 나선 것 같은 느낌. 무엇인가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매듭을 푼 느낌이었다. 돈벌러 미국으로 떠난 것으로만 알았던 증조부, 그 증조부는 조국의 가족들에겐 산이었다. 큰 산이었다. 조국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했던 큰 산이었다.

KBS의 장영주 팀장과 일행이 묘지를 떠나 내려올 때 땅거미가 내려앉은 묘지 건너편의 제 2갱구에서 아리랑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4대 아리랑 연고지를 찾다.

인생 50년 반세기 동안 해외생활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리랑을 부르며 살아온 한국인임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아리랑 연고지들을 가보지 못했음이 아쉬웠다. 해외로 나가기 전에 대학학부 시절이나 대학원 시절, 전공분야가 지리학이어서 야외실습이다 뭐다 해서 기회 있을 때 마다 남한의 각처를 돌아다녔다. 해외 교수생활에서 혹은 풀브라이트 교수로 조국을 찾았을 때도 시찰이다 조사다 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녔건만 아리랑의 연고지인 정선, 밀양 그리고 진도에는 발도 대지 않았었다.

이런 처지인데 2005년 아리랑 고장을 찾겠다고 서울에 왔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정선, 밀양, 진도를 찾게 된 것이다. 아리랑 고장의 여러 분들과 만나고 그 산천을 접했을 때 나도 모르게 그 고장 사람들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하기야 일찍이 인문지리학자 이중환도 정선같은 곳을 지리학적 각도에서 풀이하며 그 매력을 기술했음에야. 지금 그분의 연작[택리지]를 읽어 보면 과연 뛰어난 통찰력과 관찰력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

정선 아리랑의 슬프고 애절한 가락은 해외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 색다른 문화에서 느끼는 고립감, 그러나 그 역경에서 헤어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외침인 듯하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순박한 마음, 선하고 착한 얼굴들, 그들에 대한 친밀감, 그것은 정선뿐만 아니라 밀양, 진도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서강대학교 김열규 교수가 은퇴하고 고향인 경상도 고성에 머물게 되면서 기자와 나눈 대화에서 "내가 아리랑을 조사하느라 각 지역을 찾았을 때 내 스스로 한국인에 가까워진 것을 느겼다"고 했다. 바로 그 심정이 내가 아리랑 고장을 찾았을 떄 느낀 심경 그것이었다. 밭에서 돌아온 거친 손에 호미자루를 들고 서 있는 할머니의 그 선한 얼굴, 음식점에서 곤드레나물 점심을 만들어 준 아주머니의 꾸밈없는 모습, 그리고 식탁에 오른 맛깔스런 반찬들, '이 맛이 고국의 맛이구나'하고 아리랑 고장의 풍취와 인심에 취하곤 했다.

문득 정선 지역을 떠올리니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읽은 아리랑에 관한 사연이 생각났다. 강원도 삼척에 사는 홍인표씨는 현재 그 지역 노인회장을 맡고있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입대했는데, 어느 날 시골 마을을 행진하다가 짐을 지고 가던 어린아이와 비껴지나가게 되었따. 그때 그 어린아이가 구슬프게 아리랑을 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병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행진을 멈추더란 것이다. 아이가 부른 아이랑에서 마치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같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혁명투사 김산이 말한 아리랑 열두 고개, 이국생활에서 넘어야 하는 아리랑 고개, 그래서 나도 모르게 차에 올라 핸들을 잡을 때면 흥얼거리게 되는 아리랑.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생각나는 노래, 이 아리랑이 자칫하면 포기하게 되는 이국생활을 제자리로 끌어올려 주었다. 아리랑은 패배의 노래가 아니고 극복하고 전진시켜 주는 노래, 한을 삭여주는 승리의 노래, 일본이나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유럽등 어느 곳에서든 동포들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는 노래가 아니던가.

제2차 세계대전 떄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노수복 할머니, 그 일본군들 사이에서 좌절하지 않고 끈덕지게 살아남게 해준 것이 아리랑이었다는 증언. 이 아리랑의 힘은 해외생활에서 한국인이면 느끼고 있는 최대공약수다.우리 몸 한구석에 어쩔수 없이 도사리고 있는 자부심. 그것을 누가 건드렸을 때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 이런 힘을 아리랑에서 얻게 된다. 그래서 꿋꿋한 '아리랑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살게 한다.

아리랑의 연고지 정선, 밀양 그리고 진도를 찾고나니 아리랑의 실체에 더욱 가까이 가고 싶어졌다. 나도 아리랑꾼이 되어가는 듯 하다.

/[한 지리학자가의 아리랑 기행-저자 이정면 박사] 중에서 다음 호에 계속

추천5 비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94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Copyright © utahkorean.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