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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기행- 아리랑과 관련있는 분들-이태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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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946회 작성일 07-09-2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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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나의 길, 나의 아리랑

2. 아리랑과 관련있는 분들

이태규박사와 아리랑

  이태규 박사와의 만남은 1970년 캘리포니아 대학(Fresno)에 근무하면서 유타대학교로 인터뷰를 가게 되었는데 이때 3일간의 인터뷰를 마치고서였다. 미시간대학 유학 시절 한국 유학생 모임에서 종종 이태규 박사의 명성과 검소한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이태규 박사를 찾아뵈었을 때도 역시 대학 부근에 있는 아파트에서 검소하게 살고 계셨다. 사모님이 지어주신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유타대학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이 박사님은 소문대로 뛰어난 학자이셨다. 학문밖에 모르는 선비였고 말씀이 적은 조용한 분이었다. 이때 유타대학교에서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며 격려를 해주셨다.

  1972년 여름, 나는 교수 발령을 받고 드디어 유타대학교에 부임했다. 그래서 이 박사님을 모시고 교수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분의 생활은 판에 박은 듯 365일 변함이 없으셨다. 연구실에서 댁으로, 댁에서 연구실로만 이어지는 생활이었다. 선생님 댁이 대학 부근에 있어서 화학과 연구실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0여 분, 천천히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점심때는 언제나 꼭 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다시 연구실로 오셨다. 따라서 외식 같은 것도 거의 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 당시에는 일식집이 하나 있었을 뿐 한국 음식점은 전혀 없었다. 우리 집과 가까워서 가끔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본래 나도 주위 사람들이 '조개입' 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 없지만, 이 박사님은 정말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이 박사님은 '한국과학원'으로 부임해 가시면서 한국 유학생의 '고문'을 꼭 맡아 달라고 하시며 유타대학교 캠퍼스 사정과 교포사회에 대해서 속에 있는 말씀을 해주셨다. 당시 한인사회라 해봤자 조그마했지만 그때 전해 주신 말씀이 나의 유타 생활에 좌표가 되었다. 바로 이민사회란 수가 적고 많고 간에 말이 많으니 말조심이 중요하다고 하셨던 것이다. 말레이시아대학에서 초빙교수로 3년간 근무할 때 2백여 명의 한국 의사들 사이에 있었던 불편한 관계를 보더라도 사회생활에서 말조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었다. 말레이시아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부임했을 때 벙어리 3년, 봉사 3년, 귀머거리 3년, 합쳐 9년간은 말없이 살기로 작정하고 미국에 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습성이 되어 말수가 더 적게 되었다.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이니 많이 듣고 말은 적게 하라'는 금언을 실천해 온 것이다.

  그분이 25년을 유타대학교에 계시다 떠나고 나니 허전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그야말로 유타대학교 터줏대감으로 계시다가 떠나신 것이다. '과학원'에 계실 때는 한국을 가게 되면 꼭 찾아뵈었는데, 와이셔츠를 걷어 올린 채 강의실에서 오피스로 돌아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90년 이 박사님의 미수(米壽)를 기념하여 옛 유타대 제자였던 최상업, 장세헌, 한상준, 김완규, 이용태, 김각종, 우에하라 요세이, 김창홍, 이경식씨 등 36여 명이 뜻을 모아 기념논문집을 발간했다. 이 박사님 친필로 서명하여 보내주신 그 기념논문집을 서가에 꽂아놓고 틈틈이 읽곤 하였다. 물론 학문적 차원을 제외하고 인생을 살아오신 것이 여러 의미에서 나와 비슷하여 한결 친밀감을 느꼈다.

  그런데 세계적인 석학이신 이 박사님이 서울문리대 학장으로 2년간 근무했으니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을 것이다. 지금과 달라서 당시 사회가 신탁통치 찬반에다 좌우로 나뉘어 그지없이 복잡했던 때였다. 사상이 앞서 스승도 제자도 없던 그 시절은 1960년대 중국의 홍위병이 날뛰던 때와 비슷한 정국으로 대학 운영에 심로(心勞)가 컸을 것이다. 아끼고 또 아끼던 제자를 교수직에다 앉혀 놓았는데 그들이 사상의 장벽 때문에 아무런 인사도 없이 사직서를 내던지고 떠나니, 실험실에 묻혀 살던 분이 얼마나 상심하셨으면 학장직을 그만두고 연구실로 다시 돌아가셨을까. 참으로 한 많은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유타대에 계실 때 해주셨으면 이 박사님을 좀 더 잘 모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나는 교토대학 교수로 계시다 서울 문리대 초대학장을 거쳐 프린스턴대학에서 유타대학교로 오신 것만 알고 있었다. 공식적인 일로 만나 뵌 적이 많고 사적으로 만나 뵐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이 박사님의 과거지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 박사님 역시 구질구질한 과거를 이야기할 분이 아니었다.

  교토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7년간 연구실 조수와 중학교 강사를 지내셨다고 하니, 보통 사람으로서 해낼 만한 일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피눈물 나는 기막힌 생활, 차별과 모욕, 당당한 교토대학 박사님이 중학교 시간강사라니. 그리고 실험실 조수, 지독한 차별을 견뎌낸 것은 이 박사님의 순교적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도교수였던 호리바 노부오시가 이 박사님을 각별히 아껴준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조교수로 임명될 때 교수회의의 반대와 문교부 당국의 압력이 있었음에도 조교수 발령을 추진한 것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치였다. 많은 일인(日人) 적격자(適格者)가 있었는데도 왜 조선인이냐고 들이대었건만, 이 박사님의 뛰어난 성품, 목적, 목표 달성을 위해 참고 밀어붙인 인내심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인유덕(백인유덕)의 격언을 그대로 실천한 분이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이 박사님이 조교수 시절 연구를 더 하고 싶어 했으나 대학에서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결국 당시 한국의 재벌 김연수씨가 후원해서 해외연수를 떠났다. 그런데 연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일본 정부에서 귀국명령을 내렸다. 만일 그 사람이 일본이었다면 곧장 교토대학에 복직을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박사님을 소환해 놓고 그대로 공중에 띄워 놓았다. 2년간 전직 교토대학 조교수가 실험실에서 소일했으니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인내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비통하고 처참했을까? 일본인 같으면 해외연수에서 돌아왔다고 하면 당장에 복직이 되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것이나, 이 박사님이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했던 것이다.

 그들도 인간인지라 결국 1943년에 이 박사님을 교수로 임명했다. 일본에서 교토대학 교수라고 하면 대단하다. 모두들 우러러보는 자리였다. 천하의 교토대학 교수로서 당당히 조선인의 명성을 높였던 것이다. 나는 1990년대 교토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 박사님이 살고 계셨던 햐꾸만벤 거리를 거닐며 이 박사님의 교토대학 생활을 되새겨보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은 물론 전 세계가 일본의 항복방송에 쏠려 있었다. 틀림없이 일본은 망했다. 지긋지긋한 식민지 시대가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이 박사님은 이 방송을 실험실에서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 만세,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고 한다. 그러고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통곡을 했다. 한민족으로서 누군들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박사님은 다른 곳도 아닌 적지 일본에서 갖은 설움, 울분, 멸시, 차별을 당하며 살아왔기에 더욱 벅찼던 것이다.

 그래서 연구실에서 뛰어나와 유학생들을 만나 목이 터지도록 아리랑과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아리랑은 불의와 부조리에 맞서 부른 노래로 그 바탕에 저항성이 깔려 있고, 아리랑을 듣고 부를 때 갖는 동질감과 원한을 풀어내고 서로 새롭게 살아가는 정신이 담겨 있기에 평소에 어디 숨어 살았는지 볼 수 없었던 한국인들이 몰려나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고 아리랑을 불렀다는 것이다. 대학교수도 유학생도 강제 징용되어 군수공장에서 탄광 등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목숨을 부지해 온 그들. 그간 얼마나 차별과 모욕 속에서 살아왔던가. "아, 조국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 하며 이제는 부모님이 기다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는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아리랑은 민중의 삶과 한을 응축시킨 노래이기에 우리 민족이 그렇게 오랫동안 불러왔다. 아리랑이 일제 강점기에 특히 많이 불린 점을 생각한다면 아리랑의 무대가 일제 강점기인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아리랑에 담긴 정서를 민족 대서사(大敍事)의 이념으로 바꾼 조정래의 대하소설《아리랑》은 그 웅대한 착상에 마음이 끌린다. 이 책 곳곳에 담긴 아리랑은 탄광에서, 전쟁터에서, 대학 연구실에서, 그리고 만주 시베리아 벌판에서 불렀던 아리랑이며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준 민족의 노래임을 잘 보여주었다.

/[한 지리학자가의 아리랑 기행-저자 이정면 박사] 중에서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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