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기행- 아리랑과 관련있는 분들-고권삼 교수 > 이정면의 교양칼럼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이정면의 교양칼럼

아리랑 기행- 아리랑과 관련있는 분들-고권삼 교수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653회 작성일 07-11-24 17:50

본문

고권삼(高權三) 교수와 아리랑

고권삼 교수는 내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다닐 때에 을지로 6가 대학 구내에서 종종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언제보아도 묵직해 보였다. 입고 있는 의복도 멋지거나 세련된 것이 아니고 어느 모로 보나 대학교수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들고 다니는 가방도 언제나 같은 것이었고, 웃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솔직히 말해서 학생 때 가졌던 고 교수에 대한 인상은 참으로 우직해 보였고 무엇인가 항상 생각하는 분이었다.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교수로 남아있다.

  그 고권삼 교수가 일제 탄압에도 불구하고 ‘아리랑’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분이라는 사실은 놀라웠다. 나는 고 교수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당시 서울대학교 사학과 선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고, 후배 정치과 교수들에게도 수소문했으나 그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없어 모른다고 했다.
  다만 최근에 얻은 자료에 의하면, 그는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은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제주도 정의현감, 고창현감을 지낸 고계정(高啓正)의 손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1927년 3월에 와세다 대학(전문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 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다년간 민족계몽운동에 전력해 왔으며, 유학시절인 1921년 5월 고향에서 성산 청년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것이 원죄로 일제 당국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동국대 교수, 서울대 강사를 역임했다. 또한 초대 국회의원 선거(1950년)에 남제주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 후 6.25 때 납북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고 교수를 캠퍼스에서 자주 만났던 것은 아리랑 인연으로 치면 행운이 아닌가. 오늘 아리랑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되고, 그 분의 아리랑 철학, 이른바 ‘아이롱주의’를 더듬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참으로 기구한 만남이 아닌가 싶다.


고권삼 교수의 아리랑관

  고 교수와 아리랑에 대해서는 1933년 일본 고고서원(考古書院)에서 발행한 《근세조선흥망사》의 서론에서 아리랑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부터다. 이후 아리랑에 관한 글들을 발표하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에 의해 발표하지 못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일본 오사카에 있는 조선신보사(朝鮮新報社)에서 간행한 《조선정치사》에서 ‘아이롱(啞耳聾)주의’를 통해 아리랑관을 피력한 것이다. 즉 아이롱주의는 간디의 무저항주의보다 우위적인 사상이라는 주장이다.

  고 교수의 첫 저서《근세조선흥망사》 서문에 따르면,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연구소 연구원이었고, 저술이 문제가 되어 일제에 투옥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저술은 《근세조선흥망사》에 이어 1937년에 《극동의 위기직면》을 출간했다. 해방 후인 1947년에는 《조선정치사》를 발간했고 이듬해 국내 을유문화사에서 다시 《조선정치사》를 출간, 이때 서울대에서도 강의를 하게 되어 나와 말없는 상면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아이롱주의

  ‘아이롱주의’는 《조선정치사》 제4편에 언급하였다. 고 교수는 이 글 서두에서 일제 강점기 아리랑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쓰려 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으로 자유롭게 발표하지 못한 것을 유감천만이라고 하며 아리랑을 처음에는 ‘정치적 방임주의로 썼으나 오해’였다고 했다. 그리고 아리랑을 처음에는 ‘아이롱주의’에 대한 오해를 정정하려 했으나 역시 일본 당국의 탄압으로 발행하지 못했다고 했다.

  고 교수의 아리랑이 조선시대 초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고, 그 시점이 서양의 르네상스 운동기와 근접해 있음을 상기시키며 저항정신이 주조인 노래라고 강조하였다. 매우 의미심장한 주장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14세기부터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을 바탕으로 부흥을 부르짖으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예운동을 르네상스라고 한다. 그런데 좀 더 넓게 보아 그것은 중세 말기 변동기를 맞아 인류생활 전반에 걸친 혁신운동인 것이다. 이 운동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며 어느 개인에 의해서 주도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마침내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신을 중심으로 하던 중세문화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문화로 변천해 온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다.
 
  조선조 초에는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대한 소위 충절 신하 그룹인 정선 남면 7현(賢)이 있었다. 이들은 불사이군 정신으로 조선정부의 출사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등지고 보고 듣지 않은 듯 살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리랑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는 바로 오늘날의 ‘아이롱’ 설이기도 하다.
 
  “아이롱은 어떤 것인가?” ‘아(啞)'는 벙어리 아, ‘이(耳)’는 귀 이, ‘롱(聾)’은 귀먹을 농자다. 귀먹은 병을 ‘이농증’이라고 한다. ‘아이롱 어원설’은 김지연의 1930년 《조선》과 1935년 《조선민요아리랑》에 나오는데 세상사 시비에 대해 벙어리 되고 귀 막고 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문헌을 고 교수가 1921년 전남 광주에 갔을 때 여관에 숙박하고 있던 강진 사람 최모가 제공해 주었는데, 이것을 일본 경찰에게 압수당했다고 한다.

  한편 이 아이롱설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원납전과 부역을 강요하자, 백성들이 ‘차라리 벙어리가 되어 못 들은 척하고 싶다’는 뜻에서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대원군(이하응)의 야심 찬 대토목공사인 경복궁 중수는 당시 정치상황에 의해 강행되었다. 따라서 이 공사를 계기로 기원했다면 아리랑은 다분히 풍자적이고 저항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리랑에 나오는 고개는 현상적인 고개가 아닌 ‘역사적 고난’을 말 한다고 본다. 그래서 글의 키워드인 ‘아이롱주의’는 아리랑 고개를 넘기 위한 실천적 행동원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조선 초에도 ‘아리랑고개’를 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어떻든 이 ‘아이롱주의’는 시대 배경으로는 서양의 르네상스 운동과 연관을 지었고. 사상적으로는 인도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연관을 지어 설명하였다. 마틴루터 킹도 이 간디의 무저항주의를 택했다.

  ‘아이롱주의’는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비폭력 비협동주의다. 간디의 사상은 과연 조선의 아이롱주의와 동일하지만 그것을 모방한 것이 아닌 독창적인 것이다.

  비폭력 비협동은 전력을 다해 억압자에 반항하는 것이다. ‘아이롱주의’도 폭력을 부인하고 비협동의 정신을 가지고 싸우자는 것이 된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간디의 비폭력 비협동주의는 소극적인 데 반해 ‘아이롱주의’는 적극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고권삼 교수도 아이롱주의가 인도 간디의 비폭력 비협동주의와 상통하지만 적극성이 다르다고 이러한 특성을 뒷받침했다. 바로 3.1운동과 같은 실천적인 행동이 있었음을 들었는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비폭력 비협동의 이상의 정치적 가치는 문화적으로 진보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다. 조선의 ‘이이롱주의’는 간디의 접근과 비교할 때 근본적이요 적극적인 데 더욱 가치가 있다. 이 ‘아이롱주의’는 정치상에 있고 위대한 존재요, 또 조선의 정치사를 빛나게 하는 문화적 요소다. (중략) 아이롱주의 철학은 평화주의다. 평화가 없고는 건설이 없고 건설이 없고는 문화가 없고 문화가 없는 데는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평화의 사도요 인류 평화의 지휘자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아리랑은 경복궁 중수 이후부터 일제 강점기 때 고난을 극복하게 해준 하나의 이념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리랑은 식민지 치하에서나 아니면 광복 후의 분단 상황에서나 다같이 이른바 제3세계적인 민족주의운동의 일환으로 재창조되고 또 노래 불렀다는 사실을 각별히 강조함으로써 아리랑이 다른 민요가 향유하지 못한 영예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뜻에서 다른 민요들이 전통적. 민속적이라면 아리랑은 역사적. 민족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음악적, 문화적인 위치보다도 상징성이 더 우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적은 대로 나는 단편적인 아리랑 사연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인연으로 <유타 코리안 타임즈>에 아리랑을 주제로 칼럼을 쓰게 되었고, 세 번에 걸쳐 아리랑 연고지 답사를 바탕으로 기행기를 쓰게 된 것이다. 

 /다음 호 계속

추천4 비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94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Copyright © utahkorean.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