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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기행- 아리랑과 관련있는 분들-청화(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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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381회 작성일 07-11-2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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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淸華) 큰 스님과 아리랑

  1993 년 2월 중순에 청화 큰스님이 7명의 스님을 대동하고 유타에 오셨다. 3일간 체류하면서 우리 교민을 위해 법회를 열고 여러 단체, 유지 그리고 학생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좋은 말씀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한스빌(Huntsville) 부근에 있는 천주교 수도원을 방문하시고, 서울 공간사 고 김수근 씨가 설계한 '한국평화공원'도 둘러보면서 여러 가지 의견도 전해 주셨다. 청화 큰스님의 종교관에 대해서는 <솔트레이크 트리뷴> 기자와의 인터뷰(1993. 2. 20)에서 밝힌 바 있다. 청화 큰스님은 "종교는 하나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계셨으며 각 종교 간의 장벽, 아니 벽을 낮추는 데 마음을 기울이고 계셨다.

  청화 큰스님과 나의 만남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1946년 전남 구례군 구례중앙소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전근 발령을 받고 같은 해 광주수창소학교로 부임했었다. 이 무렵에 학제가 변경되어 사범학교 본과를 1년만 수료하면 2년의 예과 코스를 밟지 않아도 서울대학 응시가 가능했었다.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를 못했던 소원을 풀 때가 왔구나 하고 교사직을 그만두고 머리를 깎고 광주사범 본과에 입학했다.

  이 때 나와 같은 꿈을 가지고 입학했던 청화 큰스님과 소설을 쓴다는 이의로 형이 같은 클래스메이트가 되었다. 95% 정도가 젊은 학생으로 반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나보다 연령도 손위고 생각하는 방향도 같아서 우리 셋이 곧바로 가까운 벗이 되었다. 이래서 직장을 버리고 공부하러 온 보람도 서서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이와 같은 복된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학원소요다 뭐다 해서 학교는 데모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좌익이다 우익이다 하면서 학원은 흔들리고 수업다운 수업은 진행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교사들도 데모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배움의 희망과 꿈은 슬슬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수백 명의 학생들이 갑자기 교정에 모여 데모에 참가한다는 성토대회가 벌어졌다. 당장 시내로 행진하면서 데모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래서 전교생들이 줄지어 시내를 향해 행진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당시 학생 대표였지만 회장단들과의 접촉도 없이 좌익 노선에 서있는 학생들의 주도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의 혈기에 이끌려 혼란한 상황이 더욱 가열 되었었다. 그런 혼란을 진정시켜보려 단상에 올라 학생들을 이성적으로 이끌어보려 했지만 이미 그들의 가슴에 끓는 피가 쉽사리 가라 앉혀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에 남아있는 것도 좋은 모양새가 아니고 학생 대표의 신분이므로 데모대의 선두에 뛰어들어 시내로 향했다.

  아마 한 시간 반쯤 행진하여 광주시 북동에 있는 성당 부근에 도착했을 때였다. 돌연히 무장경관을 가득 태운 트럭이 데모대 앞에 나타나 아무 말도 없이 데모학생들에게 총을 난사하는 것이 아닌가? 빵! 빵! 빵! 총소리와 더불어 우리 데모대 뒷줄에서 "아이고메" 하고 신음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학생들은 쏜살같이 대열에서 벗어났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 숨어 있던 집 주인 아주머니가 "경찰관은 다 갔다"고 말해주었다. 경양못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소식을 들었다. 어제 "아이고메" 하고 쓰러진 벗은 최동섭 군이었다. 무릎에 총을 맞고 병원에 입원중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여건 속에서 무슨 공부가 되겠는가? 이것저것 다 그만두기로 하고 학교를 뒤로 했다. 이럴 때는 언제나 북동에서 혼자 하숙하고 있던 강형(청화 스님) 집을 찾아갔다. 의외로 형도 학교에 가지 않고 바로 거기에 와 있었다. 어제 데모 때 총 맞아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와 같은 대화가 오갈 때 강형은 언제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화를 리드했다. 우리 이야기의 결론은 나라가 정치적으로 불안한 이 때, 조용히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비현실적이 아닌가 하는 데 도달했다. 결국 공부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흑산도에 들어가서 글이나 쓰고 조용히 외로움을 달래며 아리랑을 부르며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흑산도에 맨손으로 갈 수는 없는 것. 교사증이 있으니 적어도 소학교 교사 발령을 받아가지고 가야 먹고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제의했다. 그 발령 관계 접촉은 내가 맡기로 했다.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구례 산중에서 광주 도시로 전근시켜 주신 나경민 장학사가 도청학무과에 계셨기 때문이다.

  다음날 세 사람은 학무과를 찾았다. 두 벗을 옛 도청 앞 은행나무 밑에 대기시켜 놓고 학무과로 들어갔다. 마침 나 선생이 계셨다. "나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드리자 "이 선생, 수창소학교 생활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이번에 수창소학교를 그만두고 대학진학을 위해서 광주사범에 입학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나 선생님의 심기가 편치 않은 것 같았다. 사람이 좀 쓸 만하다고 생각해서 전근시켜 놓자마자 말 한마디 없이 사직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왕 왔으니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용기를 내서 말문을 열었다. "실은 저하고 두 벗이 함께 흑산도로 가기로 작심했습니다. 행여 교사 발령을 내주실 수 없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라고 하자, "이 선생이 흑산도로 가세요? 그 곳에 가 있는 사람들도 육지로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왜 흑산도로 가세요? 내 손으로는 이 선생을 흑산도로 못 보냅니다." 하고 말문을 닫았다. 그 이상 진전이 없을 것 같아 "잘 알았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인사를 드리고 학무과를 뒤로 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벗들에게 "다 틀렸네"하고 전했다. 이래서 세 사람은 뿔뿔이 헤어졌다. 강형은 1947년에 백양사 운문암 금타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 40년간 하루에 한 끼만 먹고 하루도 바닥에 등을 대고 눕지 않는 장좌불와의 수행과 정진으로 놀라운 참선의 경지를 보여준 스님이 되었다.

  이의로 형은 교장선생님을 하게 되었고, 나는 대학을 거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세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내가 1982년에 풀브라이트 교수로 한국에 오게 된 때로 헤어진 지 40년이 되던 해였다. 마침 서울무역회관에서 법회가 있어 상경하신다는 소식을 옛 제자 이순렬 부부가 전해 주어 서울호텔에서 만났다. "이형을 40년 가까운 세월에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었소."하고 청화 큰 스님이 말문을 여셨다. "저 역시 한국을 찾을 때 마다 학형의 거처를 수소문했었소."라고 대답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곡성 태안사에서 1개월간 스님과 같이 생활했다. 이때 이곳을 찾아준 한정철 원장 내외분, 강대기 교수 내외분, 그리고 옛 제자들이 큰스님을 모시는 뜻있는 시간을 가졌던 그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미국 LA 외곽의 팜스프링스, 캘리포니아 카르멜(Carmel) 소재 삼보사, 또는 전남 곡성 옥과에 있는 성륜사에 계셨을 때 다시 찾아뵈었다. 아리랑은 만남과 헤어짐, 이별의 노래라고도 하지만 2001년 봄 오병문 전 문교부장관, 김태욱 전 광주케이블 TV 네트워크 사장, 그리고 내자와의 만남이 마지막이었다. 큰스님은 2003년 11월 12일 오후 10시 30분, 80세로 입적하셨다. 큰스님과 벗으로 지냈던 인연으로 정원(淨圓)이라는 법명을 주시고 가신 청화 큰스님을 그리며 나머지 인생을 곧게 바르게 살아보려 한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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