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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기행- 특공대 출격에 앞서 아리랑을 불렀던 탁경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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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009회 작성일 09-02-20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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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 놀랍게도 그 노래는 조선의 노래 아리랑이었다. 순간 두 모녀는 그가 조선인임을 알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조선인임을 아리랑으로 밝힌 것이었다. 노래를 부르고는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본토 방어의 방패로서 지란을 비롯하여 큐슈 각지의 기지에서 젊은 특공대원들이 돌아올수 없는, 아니 귀환을 기대할 수 없는 전투기를 타고 대공포화 속을 ‘기체투하’ 명령을 받고 출격하였다. 출격기는 가이문다케를 목표로 그 산의 바른쪽을 보면서 오키나와 바다를 향해 날아갔다.

  탁경현 소위가 지란에서 오키나와로 출격한 것은 제 7차 총공격인 1946년 5월 11일 오전 6시 30분, 그날 오키나와에는 가랑비가 내렸다. 산화해 버린 모든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출격후 탁경현의 최후는 알수가 없다.

  지란 비행장의 지하호에 설치된 통신병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특공대에는 대장의 비행기에만 통신장비가 설치되어 있다. 대장기가 돌입 전에 격추되면 대원들은 자기 비행기의 돌입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탁경현이 ‘적함’에 ‘기체투하’했는가의 여부도 사실은 모른다. 미함대의 대공포에 의해 공중에서 폭파되기도 했으니까. 모든 발신음이 끊어진 것이 9시 15분이었고, 36명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탁경현 소위의 스물네 살 꽃다운 목숨은 패전 3개월 전 남쪽 바다에 내던져진 것이다. 그렇다면 탁소위는 왜 특공대원을 지원했을까? 탁 소위의 실장을 파헤치려 했던 기록작가 시마하라는 이렇게 분석하기도 했다.

  “젊은 나는 반드시 죽을 운명 위에 놓여 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특공대원으로 죽어 가족의 입장을 좀더 바람직하게 해드려야 겠다고, 어떻게든 불쌍한 어머니를 군신의 어머니로 만들어야지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특공대는 신의 가족, 군신의 어머니로 대우 받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동급생들로부터 고통과 차별을 받고 자란 탁 소위는 일본 사회에서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부모님 그리고 누나와 동생의 처지를 생명을 내건 행동으로 구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슬프기 한이 없으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적어도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지 않았다면 젊은 청춘을 내버릴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일본 속에 죽음을 남긴 대위 탁경현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는 1984년 8월 고향인 경남 사천군 서포면에 현창비를 세우려 했던 상화에서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일본에서 준비된 위령비 정면에는 탁 소위의 이름이 새겨졌고, 뒤면에는 “일본 육군대위 아리랑 가미가제 파일럿 탁경현(일본명 光山文博)군!”이라고 새기고 다음과 같은 글이 이어져 있었다.

  “너의 열렬한 충성과 소중한 희생 위에 이루어진 양국의 평화와 번영을 영구히 인도해 주소서. 이곳에서 태어난 군은 이곳의 숲속에서 고이 잠드소서.”

  비문은 공교롭게도 성이 같은 미쓰야마라는 일본인에 의해 쓰여졌다. 그런데 이 현창비는 외구리에 서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열렬, 충성,희생”이란 문구를 한국의 신문이 “가미가제 특공대원을 미화한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 했기 때문이다. 그후 문구를 고쳐 당국의 건립 허가가 났으나 끝내 현창비는 건립되지 못했다.

  탁경현의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호타루>(반딧불)로 영화화 되었다. 그이후 위령비 건립은 일본의 지한파(知韓派) 여배우인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54) 씨가 다시한번 추진하게 되었다.

  구로다씨 꿈 속에 한국 청년이 나타나 자신의 죽음을 말했고 그 꿈 이야기를 일간지(요미우리 신문)에 기고했다. 누군가가 그 청년을 탁경현(아니 마츠야마)라고 일러주었고, 구로다씨는 그의 가족을 찾아 모든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천시에 탁경현의 귀향비를 세우겠다는 뜻을 전했다. 사천시로부터 허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원금까지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거센 항의로 제막식이 취소되고 구로다씨는 “영혼이 돌아올수  있도록 위령비를 세웠는데 아쉽다"며 눈물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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