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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직의 아악 보전과 다나베 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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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248회 작성일 09-03-0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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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아리랑과는 크게 관련은 없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본 속의 한 인물에 대해 살피려 한다.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라는 인물이다. 그는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이왕직(李王職) 아악부(雅樂部)를 조사한 다다 다다스케(多田忠助)와 더불어 동양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조선음악, 소위 백제.신라.고구려 등 3국의 음악이 어떻게 일본에 전파되었고 또 발전되어 갔으며 그에 따른 직제 등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 왔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서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의 아악은 고대 한국인, 소위 도래인(渡來人)에 의해서 발전 되어 왔음을 밝힌 인물이기도 하다.

  다나베는 <고대 일본의 음악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오늘날 일본의 아악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아악은 백제.신라.고구려로부터 건너온 도래인에 의해 창성(創成)되고 발전되어 왔으며 또 계속되어 오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아악은 일본 본토에 도래했던 조선인에 의해 다져진 예술이다.”

  이와 같은 경력을 갖고 있는 다나베가 조선 왕조 아악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한몫을 했을 뿐만 아니라 아리랑을 일본에 소개했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일본에 아리랑을 전한 사람들로 시노부 준페이, 고가 마사오 등이 있음을 살핀 바 있으나 그분들과 함께 다나베 히사오씨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참으로 애조롭고 아름다운 민요 아리랑을 본성 그대로 전한 사람인데, 다나베의 한국 음악과의 만남은 일본 궁내성 악부(樂部) 소속 ‘아악연습소’강사로 있었던 1921년부터다. 다나베의 조선 음악과의 만남은 바로 조선총독부의 ‘이왕직 아악부’의 관리를 맡으면서였다. 당시 총독부는 ‘이왕직 아악부’를 해산시키려고 했다. 이에 다나베가 의견을 제시했던 것이다.

  어느 날 궁내성 악부 악장인 카미 마사유키(上眞行)가 다나베에게 조선 총독부에서 악부에 보내온 수사본(手寫本) <조선악개요 朝鮮樂槪要>를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 이왕조에는 일본의 아악과는 다른 대규모의 아악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왕직이 패정난(敗政難)에 빠져 지금 그것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동물원이나 아악부 중 하나를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 사정을 총독부에 상의했던 바, 총독부에서는 동물원은 민중을 위해서 도움이 되고 있으나 이왕직의 아악 같은 것은 민중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를 폐지하고 동물원을 남겨두자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이왕가에서는 수백 년 전해져 온 아악을 폐지하게 되어 수백명의 악인들을 해산시키고 악장 명원벽(明元壁, 당시 70여 세)이하 6명의 노악사만을 남겨 그들로 하여금 잔무를 처리하게 하여 적어도 기록만이라도 남겨 두려고 했다. 그래서 대정(大正) 6년(1917)에 이왕가에서 편찬한 <조선악개요>대로 6명의 잔류 악사들로 하여금 악보 정리등을 하게 하고, 그것이 끝나면 완전히 해산시켜 이로써 이왕직 아악은 영구히 자취를 감추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보존 대책을 취하는 것이 급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조치를 취하자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다나베는 자신의 의견을 카미 악장에게 말했다.

  창경원인 동물원은 지금 폐지한다 하더라도 다시 필요하면 언제고 다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총독부가 말하듯 민중의 이익이라면 그것은 이왕가에 시키는 것보다 총독부가 해야 할 일이다. 아악과 같은 고전 무악(舞樂)은 일단 전멸되면 영원히 절멸(絶滅)해 버린다. 따라서 적어도 음악만은 악보를 남겨두어야 한다. 더구나 무악은 악보만으로는 사실 완전히 전할 수가 없다. 기록상으로는 이왕직 아악은 귀중한 예술이라고 생각되어 지금 총독부의 의견에 따라 이것을 영구히 버리고 만다는 것은 일본의 커다란 책임이라는 취지였다. 그리고 “저는 지금 바로 조선에 가서 이것을 조사함과 동시에 그 보존의 필요성을 총독부에 진언하여 극력 폐지를 방지하도록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1921년이라면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2년 밖에 되지 않아 저항 운동의 여진(餘震)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강한 저항의식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총독부로서는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고무하는 것은 눈 위의 흙이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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