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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순이 이야기(2020.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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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7회 작성일 20-05-24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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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86년 경남대학보에 게재한 것을 약간 수정하여 다시 적은 것입니다.>
 

서산해가 빨갛게 빛살을 발하며 고갯마루에 걸려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그립기만 하다. 처음으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원래 그림에는 소질이 없는 터라 도무지 무얼 그려야 할지 모르겠는 데다가 이 그림 한 장으로 나를 심판하게 된다니 제대로 그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청소를 하고 오후 수업을 했다. 걸상을 책상위에 얹어 교실 뒤편으로 밀어놓고 쓸고 닦은 뒤 다시 앞쪽으로 밀어놓고 쓸고 닦아내는 게 청소다. 마룻바닥에는 양초 칠을 해서 반들반들하게도 한다. 짝지 갑순이가 저금하려고 가져온 돈을 잃었단다. 나는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다. 누군가가 훔친 돈을 돌려 줄 때 까지는 우리 모두 벌을 받거나 일찍 집에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순간의 실수는 누구나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깊이 뉘우치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순순히 자수를 바라면서 자기 자신도 돈을 훔쳐본 경험이 있음을 털어놓는 선생님에게 범인은 끝내 자수를 하지 않았다. 평소 품행이 나쁜 두어명과 함께 분실자의 옆자리에 앉는다는 이유로 나도 용의자가 되어 늦도록 남아 조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용의자들은 처음 당하는 과학적 수사방법으로 분석될 그림 한 장씩을 그려야 했다. 나는 구부정한 산등성이와 고개를 기러기처럼 엇걸쳐 놓고 그 너머로 지는 해를 그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다른 선생님이 거들어서 이 그림으로 나는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 홀로 남아 자백과 장물의 사용처나 반환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참담했다. 그 그림이 어떻게 나를 진범으로 단정 짓게 했을까하는 점은 지금도 궁금하다. 산 너머로 숨는 해를 그린 내 마음이 훔친 돈이라도 감추려하는 도심(盜心)을 드러내는 것이었을까? 어떻게 내가 범인? 이제 싫건 좋건 간에 나는 범인이고 내가 자백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갑갑함 속에 시간은 흐르고 내가 진범이 될 줄은 의외였던 선생님도 충격이 크셨던가 보다. 아마, 반장으로 모든 신뢰를 하셨다가 크디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결코 훔치지 않았다고 우기는 모습이 초등학교 4학년생으로는 너무나 뻔뻔해서 괘씸하기 더 했을 것이다.

 

끝내 자백을 받지 못한 선생님은 창 안팎을 분간할 수 없도록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이 지독한 범인을 풀어주었다. 얼마나 미웠을까? 논두렁을 돌아 구부러진 길을 걸어오면서 어둠이 그렇게 고마운 줄을 몰랐다. 개울을 건너다 징검다리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었다. 아니 거기 눌러 앉아 눈물샘이 마를 때 까지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의심받는 것은 괴로운 일이므로 의심받을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참외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라했던가. 그런데 의심받을 일이라곤 한 적이 없는데 의심받는 일은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의심스러우면 사람을 부리지 말고 사람을 부리면 의심하지 말라던 말처럼 의심 또한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뜬 눈으로 뒤척이고 난 이튿날, 학교 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의혹과 경멸에 찬 시선들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뻔뻔스럽게 등교를 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와 주지 않았다. 짝지 갑순이는 결석이었다. 출석을 부르는데 그 동네 사는 친구가 대답한다. “선생니임~, 갑순이는 예, 어제 돈을 즈그 집에 두고 왔더라카데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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