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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코리안타임즈'가 걸어온 길 [원본페이지 PDF 파일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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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3,197회 작성일 07-11-2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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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Deseret News의 기자 Stephen Speckman씨가 취재한 당시 유타코리안뉴스
노(찬호)사무엘 발행인에 대한 기사(2003년)


유타코리안타임즈 창간 5주년(2007년12월1일)을 기념하며...

[본문]
2002년 창간 이래로 유타 코리안 타임즈가 걸어온 길
유타의 화합을 지켜나가는 것이 신문의 사명

   유타 코리안 타임즈가 한인 교민들에게 처음 소개된 건 지난 2002년. 지금보다는 한인 비즈니스가 활발하지 않은 때였다. 한인 식당이 두 개, 한인 식품점이 두 개만 있었을 정도로 한인들의 움직임은 지금은 물론, 다른 타 도시와 비교해 규모가 많이 작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한글 신문도 발행되지 않던 그 당시였다. 그래서 한인을 위해 한국 소식과 유타 소식을 전하는 ‘유타 코리안 뉴스’가 발행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환영하면서도,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 ‘과연 이 신문이 오래갈 수 있을까’하는 염려와 걱정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월간으로 발행되던 그 때의 유타 코리안 신문은 격주로 발행되는 현재의 유타 코리안 타임즈가 되었다. 다른 신문의 기사를 인용하던 그 때의 신문은 직접 쓰고, 번역하는 기사의 숫자가 훨씬 많아질 정도로 질적인 발전을 이뤘다. 발행 부수도, 페이지 수도,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도 많아졌다. 물론 그 동안 많은 사건도 있었고, 에피소드도 많다.

   신문을 만들기 위해 뛰어 온 사람들도 제법 여럿 거쳐간 만큼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며 코리안 타임즈의 발자취를 한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갖는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유타 코리안 타임즈는 노사무엘 발행인에 의해 2002년 12월 호를 시작으로 세상에 나왔다. 변변한 소프트웨어 하나 없이 노사무엘 발행인과 오수연 전 편집부장 둘이서 두 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제작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당시 신문을 시작한 노사무엘 발행인이나 오수연 당시 편집부장 중 신문 발행에 경험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전공분야 역시 노사무엘 발행인이 목사, 오수연 기자가 체육학으로 신문과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 밭을 일궈나가는데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이들은 고백한다.

   당시 월간 신문으로 탄생했던 유타 코리안 타임즈. 지금은 그 이름을 코리안 타임즈로 하고 있지만, 신문이 처음 나오던 때에는 유타 코리안 신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데져렛 뉴스 (Deseret News)는 신문을 처음 시작한 노사무엘 현 발행인의 소개 기사를 실으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실수 그리고 잇따르는 지적

   어떤 일이든 늘 처음엔 실수가 많듯, 코리안 타임즈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지금처럼 신문 제작에 참여인원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이유로, 오타가 특히 많이 발견되었다. 그 중 광고에 잘못 실린 전화번호 때문에 광고주에게 항의를 받았던 기억은 아찔하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소중한 추억이기도 하다.

   노 발행인은 ‘대통령 후보 약력 사건’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고한다. 지금처럼 대통령 선거로 한참 뜨겁던 2002년 12월, 노 발행인은 대통령 후보 특집 페이지를 제작하면서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약력에 이회창 후보의 약력을 넣어 노 대통령 지지자들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또한 초기에는 인쇄 품질이 좋지 않아 사람들의 많은 질타가 있기도 했다. 사진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까맣던 사진이나 너무 밝아서 글씨가 잘 안 보이는 문제 등은 당시 코리안 타임즈가 해결해야 할 우선 과제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더 전문화된 소프트웨어와 발전된 점검 시스템, 그리고 향상된 인쇄 품질 등으로 예전의 실수는 그야말로 쓴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신문을 위해 뛰는 사람들

   코리안 타임즈를 위해 뛰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원봉사 인력들이다. 초기에는 유타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참여로 신문의 기초를 다져왔다. 그 당시 특징이라면, 학생 한 명당 기사 취재와 작성, 사진 촬영과 편집, 그리고 인쇄 편집까지 다 맡았다는 것이다.

   현재의 세분화된 시스템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당시 코리안 타임즈를 거쳐갔던 학생들은 옛 이야기를 꺼내며, “신문사에서 일하며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모든 분야에 전문가만큼의 실력을 갖추었다”는 말을 하곤 한다. 국내외 교수 및 학자들의 칼럼 참여는 신문의 질을 높이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칼럼의 주제도 다양해서, 유타 및 한국 경제나 정치 이야기는 물론, 의학, 과학, 이민사회 등 여러 분야의 칼럼들이 코리안 타임즈의 지면을 채웠다. 특히 유타대학교 이정면 명예교수의 칼럼은 신문 창간호부터 오랜 기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며, 경남대학교 조기조 교수의 경제칼럼 등은 코리안 타임즈 독자의 경제적인 마인드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유타 현지 언론에 대한 꾸준한 모니터링으로 유타 한인들에게 양질의 기사를 공급하는 번역 기사팀의 이동춘씨, 광고와 재정을 맡고 있는 김인선 재정부장 등도 오늘의 코리안 타임즈가 있기까지 없어서는 안될 인물들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신문에 이름이 실리지 않았지만, 신문을 위해 묵묵히 든든한 후원을 해 주는 후원자들 역시도 코리안 타임즈에게는 소중한 자산이다.

   노 발행인은  “매 호마다 신문 완성을 위해 기자와 칼럼인, 작가, 전문가 등 참여하는 사람이 15인 가량 된다”며  “이들의 노력과 수고로 신문이 발행될 수 있다”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렇다면 신문에서 일했던 옛 멤버들의 근황은 어떨까? 초기 노사무엘 발행인과 신문을 시작했던 오수연 전 편집부장은 본지에서의 경력을 평가받아 크리스천 타임스 기자를 거쳐 현재는 LA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활동 중이며, 2003년부터 1년 간 함께 뛰어온 송기범 편집원은 현재 댄스그룹 HOT 등을 키워낸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슈퍼쥬니어라는 그룹의 매니저로 활동 중이라고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

   코리안 타임즈는 작은 지역 신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며, 유타 내외에서 벌어지는 굵직한 사건들을 직접 발로 뛰며 취재를 해왔다. 특히 취재 중간 이슈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과의 인터뷰는 코리안 타임즈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코리안 타임즈는 유타의 언론 자격으로 존 헌츠만 주지사, 피터 코룬 솔렉 카운티 시장, 락키 엔더슨 솔렉 시장, 랄프 베커 솔렉 시장 당선자 등과 단독 인터뷰를 했고, 이용태 전 삼보 컴퓨터 회장과는 삼보 본사 회장실에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나라 안팎이 북핵 문제 등으로 시끄러웠던 올해 초에는 이태식 주미대사와 인터뷰를 했고, 전시작전통제권 이양문제로 뜨거웠던 작년 9월에는 김홍래 재향군인회 부회장(전 공군참모총장)과 만남을 가졌다.

   특히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방문 당시, 직접 샌프란시스코로 취재원을 파견, 노무현 대통령을 수행하던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현재 UN 사무총장인 반기문 총장은 당시 사무총장 예비투표에서 1위를 달리고 있던 시절이라 주가가 한참 오르고 있던 때였다. 6분의 짧은 인터뷰였지만, 반 총장에게서 직접 사무총장 당선에 근접한 것에 대한 소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부시 대통령의 솔렉 방문시 함께 동행했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부 장관, 유타와 자매도인 경기도 의원 등은 유타코리안 타임즈에겐 잊지 못할 만남이다.


신문이 배포되기까지

   초기 500부를 매월 발행하던 코리안 타임즈는 현재 매 2주 1200부 이상을 발행한다. 한인 식품점과 음식점 등을 통해 배포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와이오밍, 아이다호, 샌프란시스코, 라스베가스 등으로 우편 배송이 되기도 한다.

   특히 와이오밍주에 사는 한 교민의 경우, 신문이 조금이라도 늦게 배달되면 간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신문 배송을 독촉(?)하기도 한다. 노사무엘 발행인은 “멀리서도 성원을 보내주는 독자들이 있어 힘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코리안 타임즈의 웹사이트(www.utahkorean.com)도 유타에서 신문을 받아볼 수 없는 독자들에게 유타의 소식을 전한다. 유타를 떠나 타주로 이주한 한 유학생은 “가끔 코리안 타임즈 홈페이지를 통해 유타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고 말했다.


위기의 순간들

   물론 지난 5년간 위기의 순간도 수 차례 있었다. 그 중 지난 해 갑작스럽게 터진 성추문 사건은 유타 코리안 타임즈가 언론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는데 있어, 위기 아닌 위기를 맞게 했다. 당시 불특정 인물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와 ‘당장 사건에 대한 취재를 중지하라’며 협박을 당한 뒤로 발행인이 두 차례나 미행을 당했던 사건 등은 코리안 타임즈 직원 모두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도 했다.

   한편, 2004년 여름, 노사무엘 발행인이 총영사관 취재차 여행 중이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와 사진기 등을 잃어버린 사건은 신문사에게 위기 아닌 위기를 가져왔다. 코리안 타임즈의 취재를 위해 필요한 집기(6천불 가량)의 대부분을 도난 당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인쇄 실수로 전면으로 인쇄를 다시 해야 했던 일, 비슷한 사건으로 잘못 인쇄된 부분을 바꾸기 위해 하얀 스티커를 덧붙였던 일 등은 코리안 타임즈가 5년간 걸어오면서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코리안 타임즈에게는 또 아픈 기억이 하나 있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살해한 뒤, 자신은 자살미수에 그친 옥금번스씨를 도왔던 일이 그것이다. 지난 2002년, 노사무엘 발행인은 그녀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한미 여성회 등의 단체 등과 함께 옥금번스를 돕는 모임을 맡게 되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옥금번스 추방 반대’. 백악관에 투서를 넣는 등의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그녀는 지난해 가족 하나 없는 한국 땅으로 추방됐다.


'유타코리안타임즈'가 나아갈 길

   전 세계적으로 신문의 역할과 그 규모는 줄어들고 있다. 인터넷의 발전은 이민 신문의 위축을 가져오고 있다고도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코리안 타임즈는 단순한 언론의 역할을 넘어, 유타 교민사회의 진정한 벗이 되는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이는 코리안 타임즈가 크게 귀 기울일만한 사안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코리안 타임즈는 앞으로도 한인회와의 꾸준한 교류는 물론, 유타 사회의 여러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 신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앞으로 새롭게 다가올 5년을 대비하는 각오다. 또 유타 사회에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서는 등 신문이 아닌 한인을 대변하는 곳으로도 발전하는 것이 당장의 목표다.
 
   또한 기사의 질적인 발전과, 다양성 확보를 위해 앞으로도 계속 ‘유코피아’와 같은 미국 내 언론 등과 협력관계를 이어나갈 계획이며, 독자들의 읽을 거리를 위해서라면 지금보다도 더욱 열심히 뛰는 것이 전 스태프들이 가진 공통된 마음이다.

   이민 신문은 한 사회를 연합하고, 모이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타 도시는 이민사회 신문들끼리의 과도한 경쟁, 심한 편가르기 등으로 그 사회를 분열시키는데 앞장선다는 비난도 심심찮게 듣고 있다. 코리안 타임즈는 이런 언론사의 분열은 결국 그 사회에 심각한 상처를 남기고, 한 핏줄이라는 우리의 자랑마저 무색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유타의 화합에 앞장서는 언론으로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함지하 기자
Utah Korean Times of Utah

상단에 있는 [파일 #1-6.pdf] 을 클릭하시면 신문기사 페이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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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soo-woong Lee님의 댓글

no_profile soo-woong Lee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Utah Korean Times]
축하합니다,
유타 코리안 타임즈의 성장과정 대단합니다.
멀리 한국 강원도에서 축하를 보내며~~~
날로 번창하시기를 빕니다
이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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