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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에 임진왜란을 회상한다. (1592~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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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788회 작성일 12-01-1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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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정면 유타대 명예교수
 
작년 10월 초순에 아리랑 평양간담회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조선일보사 기자와 인터뷰했다. 그 자리에서 본 것이 <지리역사 창가집> 이었다. 이시하라 가츠사부로 작사가, 다무라 도라소 작곡가로 되어있는 창가집이었다. 4행으로 끊어진 총 47서로 구성된 것이다. 1911년 12월5일 일본 문부성 검정필로 되어있는 책자이다.

이것을 번역하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본인더러 번역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차마 거절을 못하고 번역을 했었다. 그리고 나서 읽어보니 이 번역물은 단순한 <지리역사 창가집>이란 점을 넘어 1910년의 한일합방에 이어진 한반도의 식민지 정책의 합리화를 위한 작업의 하나로 보였다. 아무튼 이 책을 번역했기에 특히 그 창가집 속에 임진왜란에 관한 이야기가 이곳저곳에 튀어나와 있어 그 점에 대해 스켓치식으로 간단히 몇마디 적어보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일본인의 대부분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국의 팔도강산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던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와 고종을 위협하여 한일합방의 기초를 마련한 이토 히로부미 를 영웅 또는 위인으로 보고 있다. 한국인들은 불구재천(不俱截天)의 원수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는 대조적으로 역사상에 비친 인물들이다.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군을 혼내준 이순신 장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는 한민족의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역사상의 인물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한국과 일본 양국간에 개재하는 어쩔 수 없는 역사의식의 단층을 이루고 있다.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일본어사전에 따르면 임진왜란을 한국정벌 또는 한국출병 등으로 표시되고 있다. 이 용어에 대해서 일본사학자들은 당연히 이의를 들고 나와야 할 터인데 묵인하고 있다. 왜, 한국이 악자로 일본에 비쳤는가? 묻고 싶다.

4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등의 소위 4개국은 찬란한 문화와 탁월한 기술을 일본에 전해 고대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했던 한민족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무로마찌 시대(아시가가 씨 (足利 氏) 가 정권을 잡고 쿄토무로마치 (경도실정,京都室町)에 막부(幕府)를 연 시대) 이래 일본은 대등한 독립국으로서 교린의 관계에 있었던 조선이 어찌하여 풍신수길의 명령에 복종해야한다 말인가.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에는 교린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무시했던 발상, 즉 세계는 물론 오랜 세월 국교가 있었던 이웃나라마저도 인정하지 않았던 발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이 망측스런 망상을 "웅대한 구상"으로 찬양한 역사가도 있었다.

풍신수길의 한반도 침략은 1592년 4월14일 코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 일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어 제 이군 장수 카도키요마사(加藤淸正), 그리고 구로다나가마사 가 뒤따랐다. 이 임진왜란에 의해서 풍신수길이 영웅시되는 것은 명치 당시 사이고타카모리(西鄕隆盛)1827-1877)의 정한론(征韓論) 사상에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풍신수길에게 대해 동정적이었던 라이산요(賴山陽, 1780-1832)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칠도의 백성들이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전쟁에서 크게 얻은 것도 별로 없다" 고 비판했다. 한편 평론가 토구도미소호(1863-1957)도 "한민족의 가슴 속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울 수 없는 원한을 남기고 있다. 살육, 방화, 약탈 등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정치의 기능은 흔들리고 귀중한 문화재의 손실, 소실, 약탈로 인해 그로부터 일어서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고 했다.

아무튼 일본은 1910년 한국을 합병하여 느낀 것은 한국국민이 잊지 않고 있는 임진왜란 당시의 처참했던 기억들이었다. 모든 국민들은 이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각 지방에는 이 전쟁을 상기시키기 위한 비석, 묘비, 서적 등 또는 구비 구전 등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근거를 없애기 위해서 조선총독부 관리들은 각 지방을 찾아다니며 전력을 다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어쨌든 간에 조선이나 명나라는 얻은 것은 없고, 일본은 도자기 기술자로서 이삼평의 아리타 도기, 이작광, 이경에 의한 하기(萩) 도기, 심수관에 의한 사쯔마 도기 기타 아가노 도기, 타카토리(高取) 도기 등 전문 기술자 들을 납치해 갔다. 그리고 활판 인쇄 서적 등이 많이 반출되었다. 7년간이란 전쟁 기간에 6-7만 명의 백성들을 납치하고 그 중에는 이와 같은 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리역사 창가집에는 경남 김해가 미마나 (임나 任那)라고 하여 소위 일본부(日本府)를 두고 200년 동안 한반도를 통치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고 또는 진구(神功,신공)황후(皇后)가 신라를 정복 했다는 등이 그대로 버젓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창가집 속의 제4수. 제11수, 제19수. 제20수 등은 임진왜란 상황을 나름대로 전하고 있다.

풍신수길을 따르는 다이묘들은 각각 병졸과 수병 등을 인솔하여 히젠노쿠니 나고야(肥前國 名護屋)에 집결, 이곳에서 조선으로 건너갔었다.

북구주 오오이다 켄(北九州 大分縣)과 우스키(臼杵)의 성주 오오다 히다노가미(城主 太田 飛驒守)도 이에 참가했다. 그 때 성주의 시의(侍醫)란 자격으로 종군한 자가 안양사에 있었던 승려 케이넨(慶念)이었었다. 그는 전쟁의 상황을 본대로 노래일기인 우타닛기(歌日記)로 기록하였다. 그가 일본을 떠나 최초로 보았던 처절한 광경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 중의 한 예로, 전라도 섬진강의 하구에 닿았을 때 배 안에서 물품과 사람을 약탈해가는 처참한 광경, 울어대는 사람을 죽이고, 어미는 애를, 애들은 어미를 찾아다니는 모습 등은 케이넨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국에서의 싸움이란 이와 같은 장면의 연속으로 인간세상에서 처음 보는 생지옥이었다고도 적고 있다.

이로 인해서 임진왜란이 어떠한 전쟁이었는가를 상상케하는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조정에서는 일본의 상황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1590년(선조 23년)에 조정은 황윤길(西人)을 통신사, 김성일(東人)을 부사, 허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하여 일본으로 보내 일본의 동정과 풍신수길의 저의을 살피도록 파견했었다. 통신사의 보고는 둘로 나눠졌다. 황윤길은 반드시 침공이 있을 것으로 보고했고, 김성일은 침공하지 않는다고 알렸다. 이리하여 조정의 신하들 간에 동인(東人), 서인(西人)으로 갈라져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은 병법, 무예, 축성술, 항해술 등을 정비하고 포르투갈 인에 의해 전래된 조총을 일본국내에서 다량 생산하였다. 한편 우리나라 조정에서도 이이(李珥)의 10만 양병론도 나왔으나 외면되고, 동서의 당파싸움에 국론의 통일을 보지 못한 가운데 1592년(선조 25년) 4월14일에 15만 일본군은 한반도에 침입하여 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의 실상이었다.

금년은 임진년(壬辰年)이다. 진(辰)은 12지의 제 5위 띠로서 용(龍)에 해당된다. 따라서 올해는 ‘용’띠이다. 용이 물을 만나 더욱 길(吉) 하다는 흑룡띠 해라고 한다. 남북 간의 긴장이 풀리고 온 겨레가 건강하고 다복스럽게 지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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